우암 송시열 글씨로 추정,“영랑호”각자 발견
우암 송시열 글씨로 추정,“영랑호”각자 발견
  • 최영조 기자
  • 승인 201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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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시는 최근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추정되는 ‘영랑호’ 각자가 새겨진 바위의 발견신고를 받고 이를 문화재청에 보고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자연 석호인 영랑호 주변에는 핵석(자연적 풍화를 견디고 남은 암석)으로 불리는 커다란 바위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번에 각자가 발견된 장소는 영랑교 다리에서 영랑호 카누 경기장 방면으로 첫 모퉁이에 들어선 카페와 영랑호 호안도로 사이에 위치한 곳이다.

 바위의 동쪽 면에 ‘영랑호(永朗湖)’ 3자가 새겨져 있으며, 글자 크기는 각각 가로·세로 1자 이상으로, 세로가 1m가 넘는 큰 글씨이다.

영랑호 각자와 관련된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문집에서 찾을 수 있는데, 김유(金楺, 1653~1719)의「검재집(儉齋集)」에 “巖上刻永朗湖三字, 云是尤菴先生筆而易郞以朗”라고 나오며, 이해조(李海朝, 1660∼1711)의 「명암집(鳴巖集)」에 “湖邊石上, 刻永郞湖三字, 尤翁筆也”라고 나온다.

내용은 영랑호변의 바위 위에 ‘영랑호’ 3자가 새겨져 있는데, 우암의 글씨라고 기록해 놓은 것이다. 통상적으로 영랑호의 ‘랑’은 ‘郞’을 쓰는데, 김유는 이를 지적하면서 ‘郞’을 ‘朗’으로 바꿔썼다는 내용으로, 이번에 발견된 각자는 ‘永朗湖’로 김유의 기록으로 보면 송시열의 글씨로 추정된다.

송시열은 조선시대 서인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1674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대공설(9개월)을 주장하던 서인은 기년설(1년)을 주장하던 남인에게 패하였다. 서인의 영수이자 조선 중기 사림의 여론을 좌우하던 송시열은 1675년 1월에 함경도 덕원(현 원산, 문천)으로 유배를 가게 되며, 1675년 6월 경상도 장기(長鬐, 현 포항)로 옮기게 된다. 이 때 송시열이 속초 지역을 지나갔다는 것을 대포동 내물치마을에 전하는 설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송시열은 유배과정에서 영랑호를 지나갔으며, 호수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글자를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박재일 교육문화체육과장은 “먼저 소중한 문화자원을 발견하고 신고해 주신 김은호님께 감사드리며, 이번에 발견된 ‘영랑호’각자가 우암 송시열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관련 자료를 정리하여 지역문화를 스토리텔링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며, ‘영랑호’ 각자 바위 주변을 정비해 지역의 명소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 이라고 밝혔다.